로웰 셔먼은 188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미국의 배우이자 영화 감독이다. 브로드웨이에서 배우 경력을 시작하여 다양한 연극에 출연했으며, 1910년대부터 무성 영화에 출연하며 영화 배우로 활동했다. 1930년대에는 감독으로 데뷔하여 여러 영화를 연출했으며, 배우와 감독을 겸업했다. 셔먼은 세 번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고, 1934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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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샌프란시스코에서 극장 관련 일을 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1][2] 아버지 존 셔먼은 극장 매니지먼트 에이전트였고, 어머니 줄리아 루이스 그레이는 무대 배우였다. 외할머니 또한 배우였으며, 배우 에드윈 부스(배우 암살자 존 윌크스 부스의 형제)와 함께 주연을 맡기도 했다.[3] 셔먼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순회극단에서 아역 배우로 활동하며 경력을 시작했다.
셔먼과 캐서린 코넬이 1923년 브로드웨이 작품 ''카사노바''에서
셔먼(왼쪽), 닐 해밀턴과 컨스턴스 베넷이 ''할리우드의 대가?''(1932)에서
청소년 시절, 셔먼은 낸스 오닐과 함께 출연한 ''베툴리아의 유딧(1904)''과 데이비드 벨라스코의 1905년 히트작 ''황금빛 서부의 소녀''에서 젊은 포니 익스프레스 라이더 역으로 블랑슈 베이츠와 함께 출연하는 등 배우로서 경력을 쌓았다.
1915년까지 셔먼은 주로 사일런트 영화에 출연하여 플레이보이 역할을 맡았다. D. W. 그리피스가 그를 영화 ''웨이 다운 이스트''(1920)의 악당으로 캐스팅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했다.[3] 그는 1920년대 내내 극장과 영화에서 악당이나 플레이보이 역할을 계속했다. ''몰리 O''(1921), ''기회의 여인''(1929)과 같은 영화와 ''여가의 여인들''(1930), ''할리우드의 대가?''(1932)와 같은 토키에서도 활동했다.[4]
1921년, 셔먼은 친구 로스코 아커블의 초대로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다. 이 파티에서 버지니아 랩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아커블이 살인 혐의(나중에 과실치사로 변경)로 체포되면서 셔먼은 이어진 재판에서 증언해야 했다.[5]
셔먼은 배우로서의 경력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보다 지루한 것은 없다. 특히 성공한 경우라면... 영화에서 일하는 것은 더 지루해 보였다."라고 말했다.[3] 1930년, RKO 임원 윌리엄 르바론은 그에게 기회를 주었고, 셔먼은 영화 ''합법적인 절도''에서 주연과 연출을 맡았다. 이 영화는 셔먼이 브로드웨이 공연에서 주연을 맡았던 연극을 원작으로 한 것이었다.[8] 이후 3년 동안 그는 아이린 던과 함께 ''독신자 아파트''(1931), 메리 아스터와 함께 ''왕실의 침대''(1931), 조앤 블론델과 함께 ''그리스인들은 그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1932)를 포함한 7편의 영화에서 주연과 연출을 맡았다.
''영화 데일리'', 1932년의 가짜 얼굴 광고
1933년부터는 연출에 집중했다. 1932년의 ''그리스인들은 그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는 그의 무대와 스크린에서의 마지막 연기였다.
2. 1. 브로드웨이 경력
낸스 오닐과 함께 출연한 《베툴리아의 유딧(1904)》 등 여러 브로드웨이 연극에 출연하며 경력을 쌓았다.[3] 1923년에는 《카사노바》에서 주연을 맡았고, 《모르피아》에서는 연출과 주연을 동시에 맡았다.[6] 1926년부터 1927년까지 공연된 《분쟁의 여인》이 그의 마지막 브로드웨이 작품이다.[7]
로웰 셔먼은 1915년경부터 주로 사일런트 영화에 출연하여 플레이보이 역할을 맡았다. D. W. 그리피스가 그를 영화 《동부 저 멀리》(1920)의 악당으로 캐스팅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했다.[3] 그는 1920년대 내내 극장에서처럼 영화에서도 악당이나 플레이보이 역할을 계속했는데, 《몰리 O》(1921), 《기회의 여인》(1929)과 같은 영화와 후에 《여가의 여인들》(1930), 《할리우드의 대가?》(1932)와 같은 토키에서도 활동했다.[4]
1921년 셔먼은 친구 로스코 아커블의 초대로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다. 그가 옆방에 매담 모드 델몬트와 함께 있을 때 아커블은 버지니아 랩과 함께 있었다. 랩은 사흘 후 사망했고, 아커블이 파티에서 그녀를 강간하고 사망에 직접적으로 이르는 부상을 입혔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커블은 살인죄(나중에 과실치사로 변경됨)로 체포되었고, 셔먼은 이어진 재판에서 증언해야 했다.[5]
셔먼의 경력은 파티 참석으로 인한 여파로 크게 손상되지 않았다. 1932년 《그리스인들은 그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는 그의 무대와 스크린에서의 마지막 연기였다.
셔먼은 1930년 RKO에서 제작한 영화 《합법적인 절도》에서 주연과 연출을 동시에 맡으며 감독으로 데뷔했다.[3] 그는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연극에서도 주연을 맡았었다.[8] 이후 3년 동안 《독신자 아파트》(1931), 《왕실의 침대》(1931) 등 7편의 영화에서 주연과 연출을 겸했다.
1933년부터는 연출에만 집중하여 《그녀는 그를 잘못 대했다》(1933), 《모닝 글로리》(1933), 《열쇠구멍을 통한 브로드웨이》(1933) 등을 감독했다. 이 시기 셔먼이 감독한 영화들은 모두 비평적, 상업적으로 성공했다.[3] 특히 《그녀는 그를 잘못 대했다》는 메이 웨스트의 첫 주연작이었고, 《모닝 글로리》는 캐서린 헵번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1934년에는 로레타 영과 캐리 그랜트 주연의 《나쁜 운명으로 태어남》을 감독했다.
셔먼의 유작은 사후인 1935년에 개봉된 《신들의 야간 생활》이다. 이 영화 역시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셔먼은 세 번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첫 번째 부인은 극작가 존 헌터 부스의 여동생이자 여배우인 이블린 부스(Evelyn Booth)였으며, 1914년 3월 11일에 결혼했다.[9] 부스는 셔먼이 자신을 돌보지 않았고 잔혹했다고 주장하며 이혼을 신청했고, 1922년 3월 19일에 이혼이 허가되었다.[10] 1926년에는 여배우 폴린 가론(Pauline Garon)과 결혼했다.[11] 셔먼은 1929년 1월 25일 가론이 1928년 8월 부모의 강요로 자신을 버렸다고 주장하며 이혼을 신청했다.[12][13] 이혼은 1929년 3월에 허가되었다.[13] 세 번째이자 마지막 결혼은 돌로레스 코스텔로의 여동생이자 여배우인 헬렌 코스텔로(Helene Costello)와 1930년 3월 15일 비벌리힐스에서 이루어졌다.[14] 이로써 셔먼은 오랜 친구인 존 배리모어의 처남이 되었고, 두 사람은 배리모어의 초기 유성영화 ''제너럴 크랙''에 함께 출연했다. 그러나 배리모어의 타워 로드 저택 정원에서 셰익스피어 연기에 대한 셔먼의 발언 이후 두 사람은 사이가 틀어졌다. 셔먼과 헬렌은 1931년 11월에 별거했고 1932년 5월에 이혼했다.[15][16]
5. 죽음
로웰 셔먼은 1934년 12월 28일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이중 폐렴으로 사망했다.[17] 그는 포레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 글렌데일에 안장되었다.[18]
셔먼은 사망 당시 3색 테크니컬러 방식으로 촬영된 최초의 영화인 ''베키 샤프''를 감독하고 있었다. 병이 들고 나서도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여 제작 25일째였다.[19] 그의 사망 후, 루벤 마무리안이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마무리안은 셔먼이 촬영한 장면은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대신 영화 전체를 재촬영했다.[11][20]
루엘라 파슨스는 자신의 ''할리우드 호텔'' 라디오 방송에서 셔먼의 사망 소식을 단독 보도했다. 청취자들은 즉시 전화를 걸어 그녀의 무심한 보도 태도에 항의했고, 그녀는 방송 스폰서인 캠벨 수프사를 대행하는 J. 월리스 암스트롱 에이전시에 의해 일시적으로 정직되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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